염불만일회2005
제8차년도(2005년) |
제6차 전국염불만일회 (2005년7월 31일~8월 2일)
8차년도 덕숭산 수덕사 염불성지 대회

수덕사전경
수덕사소개
수덕사 가람구조의 아름다움은 여러 단으로 이어지는 석축과 건물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수덕사는 완만한 덕숭산의 구릉을 따라 삼단의 석축을 쌓고 가장 위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 가람이다. 앞이 탁 트인 높은 산지 지형에 석축을 이용하여 사지寺地를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배치한 수덕사의 가람구조는 사찰을 찾는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개방구조이다.
대웅전을 중심축으로한 수덕사 가람 배치는 도입 導入, 전개 全開, 결말結末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에서부터 경사진 길을 따라 황하정루 黃河精樓와 종각鐘閣, 조인정사祖印精舍, 요사寮舍 등의 부속전각을 지나면서 느끼는 상승효과로 인해 핵심부인 대웅전이 더욱 강조되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도입부는 속세로부터 사찰로 들어서는 최초의 공간이다. 일주문에서 황하정루까지의 공간은 가람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경사진 길과 계단을 통해 몸을 닦아 마음속의 불심佛心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흐름을 연결하는 전개부는 황하정루에서 조인정사까지의 공간이다. 황하정루 아래의 어두운 공간은 전개부분의 시작으로 이는 시계의 갑작스런 변화를 유도하여 시선의 집중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석축과 계단은 공간 상승의 효과와 더불어 주불전인 대웅전을 시각적으로 더욱 강조하게 된다. 결말부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을 말한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
조선 말기의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 하여 무애 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傳燈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혁명가이자 대승 大乘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속명俗名은 동욱 東旭,법명은 성우性牛, 법호는 경허 鏡虛이다. 본관은 여산廬山으로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세에 경기도 과천 청계사 淸溪寺로 출가하여 계허 桂虛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교리佛敎敎理를 익혔다. < 스님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서 중생교화와 불교중흥에 이바지한 위대한 선승이다. > 이후 당시 교계의 태두였던 동학사의 만화강백 萬化 講伯에게 천거되어 불교경론을 배우니 이로써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 一代時敎뿐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스승인 만화강백 萬化 講伯의 뒤를이어 동학사 강백으로 추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오로지 영운 靈雲선사의 “나귀 일 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無)이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유유자적 하였다. 그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 후에 활연대오하니 생사에 자재하였으며 56세에 만공스님에게 전법게 傳法偈를전한 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던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甲山 웅이방雄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니 세수 世壽 64세,법랍 56세였다.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선수행 禪修行의 풍토를 조성, 선풍을 진작시킨 그의 문하에는 근대 한국불교 선문 禪門을 빛낸 만공 滿空, 혜월 慧月, 수월 水月등이 있다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 ) 선사
근대 한국 선 禪의 중흥조인 경허鏡虛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 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속명은 도암 道 巖,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 이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부친 송신통 宋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 金山寺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 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천장사天藏寺로 와서 태허 泰虛 스님을 은사 恩師로 경허를 계사 戒師로 사미십계 沙彌十戒를 받고 법명을 월면 月面이라 하였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 金仙臺를 짓고수 년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 衲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 修德寺, 정혜사 定慧寺, 견성암 見性庵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 禪學院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 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 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 滿空塔을 세우고 진영 眞影을 경허. 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 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高峰, 금봉錦峰,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벽초碧超, 원담圓潭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제8차년도 수덕사 염불성지대회 입재 (첫째날)
불기 2549년(2005년)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충남 덕숭산 수덕사에서 역사적인 전국염불만일성지대회가 입재되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 모인 염불행자들은 2박 3일 동안 하루 일만번 염불정진을 다짐했습니다. 전국염불만일회 김재일 공동대표의 인사말씀과 함께 수덕사 법정 주지스님의 환영인사도 이어졌습니다.

▲ 김재일 공동 대표 ▶

▲ 염불입재 법회를 장식하는 풍물단원들의 영남농악시현

▲ 동산다도학과회원들의 시원한 차 공양

▲수덕사-법정 주지스님의 법문 (둘쩨날 오후)
전통적으로 선도량인 수덕사에서 염불정진하는
염불행자들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그 주인공!
그 마음을 참구하라는 법문이 있었습니다.

▲ 염불대회 행사 : 8차년도 수덕사 염불정진을 내외에 공식으로 알리는 본행사를
수덕사 대웅전에서 오후 2시에 진행하였습니다.

▲ 부처님께 헌공하는 아미타춤 시현 (둘째날 저녁)

▲ 대동재 한마당 (둘째날 저녁)
오후 8시 깜깜한 밤 대웅전 앞에서 모든 행자들이 탑을 주위로 손에
손을 잡고 어울어지는 대동제를 진행하였습니다.

▲ (셋째날)
2일째 비가 많이 온 관계로 아침에 이루어진 행선염불은
덕숭산을 2시간 동안 산행하면서 염불을 계속하였습니다.

▲ 수덕사의 선도량인 정혜사 전경!
수많은 수좌들이 하안거 90일 용맹정진에 들어가면서. 경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에 감싸 있었습니다.

▲ 회향식 마지막을 장식해주신 수덕사 무애 총무스님의 격려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웅전 앞에서 2박 3일간의 염불행사를 회향하는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8차년도 덕숭산 수덕사 염불성지 대회

수덕사전경
수덕사소개
수덕사 가람구조의 아름다움은 여러 단으로 이어지는 석축과 건물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수덕사는 완만한 덕숭산의 구릉을 따라 삼단의 석축을 쌓고 가장 위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 가람이다. 앞이 탁 트인 높은 산지 지형에 석축을 이용하여 사지寺地를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배치한 수덕사의 가람구조는 사찰을 찾는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개방구조이다.
대웅전을 중심축으로한 수덕사 가람 배치는 도입 導入, 전개 全開, 결말結末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에서부터 경사진 길을 따라 황하정루 黃河精樓와 종각鐘閣, 조인정사祖印精舍, 요사寮舍 등의 부속전각을 지나면서 느끼는 상승효과로 인해 핵심부인 대웅전이 더욱 강조되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도입부는 속세로부터 사찰로 들어서는 최초의 공간이다. 일주문에서 황하정루까지의 공간은 가람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경사진 길과 계단을 통해 몸을 닦아 마음속의 불심佛心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흐름을 연결하는 전개부는 황하정루에서 조인정사까지의 공간이다. 황하정루 아래의 어두운 공간은 전개부분의 시작으로 이는 시계의 갑작스런 변화를 유도하여 시선의 집중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석축과 계단은 공간 상승의 효과와 더불어 주불전인 대웅전을 시각적으로 더욱 강조하게 된다. 결말부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을 말한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
조선 말기의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 하여 무애 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傳燈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혁명가이자 대승 大乘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속명俗名은 동욱 東旭,법명은 성우性牛, 법호는 경허 鏡虛이다. 본관은 여산廬山으로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세에 경기도 과천 청계사 淸溪寺로 출가하여 계허 桂虛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교리佛敎敎理를 익혔다. < 스님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서 중생교화와 불교중흥에 이바지한 위대한 선승이다. > 이후 당시 교계의 태두였던 동학사의 만화강백 萬化 講伯에게 천거되어 불교경론을 배우니 이로써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 一代時敎뿐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스승인 만화강백 萬化 講伯의 뒤를이어 동학사 강백으로 추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오로지 영운 靈雲선사의 “나귀 일 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無)이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유유자적 하였다. 그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 후에 활연대오하니 생사에 자재하였으며 56세에 만공스님에게 전법게 傳法偈를전한 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던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甲山 웅이방雄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니 세수 世壽 64세,법랍 56세였다.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선수행 禪修行의 풍토를 조성, 선풍을 진작시킨 그의 문하에는 근대 한국불교 선문 禪門을 빛낸 만공 滿空, 혜월 慧月, 수월 水月등이 있다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 ) 선사
근대 한국 선 禪의 중흥조인 경허鏡虛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 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속명은 도암 道 巖,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 이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부친 송신통 宋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 金山寺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 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천장사天藏寺로 와서 태허 泰虛 스님을 은사 恩師로 경허를 계사 戒師로 사미십계 沙彌十戒를 받고 법명을 월면 月面이라 하였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 金仙臺를 짓고수 년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 衲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 修德寺, 정혜사 定慧寺, 견성암 見性庵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 禪學院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 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 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 滿空塔을 세우고 진영 眞影을 경허. 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 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高峰, 금봉錦峰,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벽초碧超, 원담圓潭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제8차년도 수덕사 염불성지대회 입재 (첫째날)
불기 2549년(2005년)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충남 덕숭산 수덕사에서 역사적인 전국염불만일성지대회가 입재되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 모인 염불행자들은 2박 3일 동안 하루 일만번 염불정진을 다짐했습니다. 전국염불만일회 김재일 공동대표의 인사말씀과 함께 수덕사 법정 주지스님의 환영인사도 이어졌습니다.

▲ 김재일 공동 대표 ▶

▲ 염불입재 법회를 장식하는 풍물단원들의 영남농악시현

▲ 동산다도학과회원들의 시원한 차 공양

▲수덕사-법정 주지스님의 법문 (둘쩨날 오후)
전통적으로 선도량인 수덕사에서 염불정진하는
염불행자들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그 주인공!
그 마음을 참구하라는 법문이 있었습니다.

▲ 염불대회 행사 : 8차년도 수덕사 염불정진을 내외에 공식으로 알리는 본행사를
수덕사 대웅전에서 오후 2시에 진행하였습니다.

▲ 부처님께 헌공하는 아미타춤 시현 (둘째날 저녁)

▲ 대동재 한마당 (둘째날 저녁)
오후 8시 깜깜한 밤 대웅전 앞에서 모든 행자들이 탑을 주위로 손에
손을 잡고 어울어지는 대동제를 진행하였습니다.

▲ (셋째날)
2일째 비가 많이 온 관계로 아침에 이루어진 행선염불은
덕숭산을 2시간 동안 산행하면서 염불을 계속하였습니다.

▲ 수덕사의 선도량인 정혜사 전경!
수많은 수좌들이 하안거 90일 용맹정진에 들어가면서. 경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에 감싸 있었습니다.

▲ 회향식 마지막을 장식해주신 수덕사 무애 총무스님의 격려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웅전 앞에서 2박 3일간의 염불행사를 회향하는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