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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종교를 엄숙하며 경건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웃음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성’의 회복이다.
웃음은 종교 간의 배타주의와 모든 갈등의 해결 방안이다.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되며, 이로써 인간은 사랑과 연민으로 이 세상
반면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웃는 장면은 찾아 과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웃음은 부정 불교의 ‘무아(無我)’개념과 그리스도교의 자
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 기비움 (kenosis)은 이런 자기부정을 전제조건으
람들이 복음서 안에서 십자가의 비극과 그 직전 로 해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의 사건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14세기 신학 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붓다가 춘다의 공양
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등의 을 받아들이면서 입멸을 맞이한 것도 이런 사랑
신학자는 ‘영원히 웃는 분’인 하느님의 사랑에 의 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해 이야기한다. 하느님이 ‘자기비움 (kenosis)’
으로 기꺼이 즐겁게 예수로 육화되려 했고, 예 21세기 현대과학문명시대에 맞는
수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웃으면서 육화된 하느 ‘과학격의불교’와
님이 자신의 삶 안에서 즐겁고 기쁘게 웃으면서 생태중심적 종교 윤리의 필요성
활동할 수 있도록 철저한 자기비움으로 응답한
것이다. 이를 보아도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십자 현대과학에 무관심하던 종교는 이제 과학적
가는 더 이상 비극적인 고통의 형상이 아니고, 성과를 포괄하는 은유와 상징의 지평을 넓혀가
오히려 자기비움의 절정인 십자가는 예수의 무 야 한다. 결국 과학시대가 성숙될수록 종교와
화의 삶을 드러낸 것이며, 타인을 향한 사랑과 과학은 서로 무관심하고 서로 맞서는 입장에서
연민의 웃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벗어나 지난 세기와는 달리 새로운 차원에서 만
인간을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압박으로부터, 남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도그마와 완전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 본 강의에서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이 과학과
유를 지향하게 하는 유머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종교의 관계이다. 지금껏 종교에서 과학을 바라
웃음’이다. 그런 유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 보는 시각이 너무나 부정적이었다. 즉 과학의
른 성찰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을 비울 수 있게 발달은 인간성의 파괴와 함께 생태계의 파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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