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붓다동산7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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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등 다섯 명은 싯닷타를 따라 수행하겠 이기도 하다. 싯닷타가 웨살리로 간 것은 유명한 요가 수행자
다고 남아있었고 다른이들은 모두 왕궁으로 돌아왔다.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웨살리근처에서 3
빈비사라왕과의 만남 백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은 무일물
라자가하에 도착한 싯닷타는 빤다와산 동쪽 기슭에 머물면서 (無一物)상태에서 체험하는 삼매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가
성안으로 걸식을 다녔다. 그 당시 마가다국왕 빈비사라는 싯닷 르치고 있었다. 무소유처정은 순수 정신적 세계 (무색계 無色
타보다 다섯 살이 적은 어린나이에 년(B.C.545 ) 16세의 나이로 界)에서 얻는 네단계 선정에서 세 번째의 선정이다. 싯닷타는
아버지 밧띠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하면서 영토확장에 강 그의 말을 듣고 열심히 수행하여 그가 말한 경지를 얻었지만 그
력한군사력을총동원하고있었다. 북방히말라야산기슭에살 가 말한 경지는 현실적인 삶을 버리고 오직 명상에 깊이 빠져있
고 있는 샤까족에게 전도유망한 태자가 태어났다는 소문은 60 는 동안에는 즐거움이 있을 뿐, 명상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
요자나(676k)가량 떨어진 라자가하까지 널리 퍼졌던 것이다. 면 전과 같이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최고의 경
빈비사라왕은 싯닷타가 빤다와산에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지라고 말한 무소유처정은 결국 허무주의로 전락하게 된다는
몸소 싯닷타를 찾아 나섰다. 수레를 타고 가는 데까지 가서 수레 것이어서 싯닷타로서는 받아드릴이가 없다. 더구나 그 당시 알
에서 내려 오솔길로 걸어서 싯닷타를 찾았다. 처음으로 만난 싯 라라깔라마는120세였다고한다.16세에출가하여 년의104 삼
닷타에게 출가자의 길을 버리고 정치를 하라고 제안한다. 국토 매를 닦았다는 그 경지에 싯닷타는 만족할 수가 없어 그의 곁을
와 군사는 물론 왕위를 내어주고 자기는 재상으로 왕을 돕겠다 떠난다.
고 까지 하였으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한다.“정말로 대 웃다까 라마뿟다 선인(2)
왕님의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왕의 자리를 버리 알라라 깔라마와 헤어진 싯닷타는 웃다까 라마뿟다를 찾아
고 출가하였거늘 내가 다시 나라를 다스리려 하겠습니까? 다시 라자카하(왕사성)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仙人이
제가 부모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자가 된 것은 생로병사 자 철학자로서 7백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웃다까는 선
의 고통을 끊기 위함이지 세간의 영욕을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 정을 통하여“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
다. 제가 지금 온 것은 알라라 깔라마 라는 선인이 해탈의 길을 常非非想處)를 해탈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싯닷타는 열심히
가르친다기에 그를 찾아가는 길이오니 대왕님의 청을 거절한 수행하여 웃다까가 체험한 경지를 체험하였으나 싯닷타에게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이 다음에 깨달음을 얻거 여전이 의문이 남아있었다.
든 가장먼저 자기를 만나 달리고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도 아니고 생각아닌 것도 아닌 경지에는“나”라는 존재
이때가 싯닷타는 세29 빈비사라는 세24 때인 년이B.C.537 되 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제법실상(諸法實相)에 대
던 해이다. 한 싯닷타의 질문에 웃다까 라마붓다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못
알라라 깔라마 선인(1) 하고 침묵만을 지키면서 싯닷타의 높은 경지를 경탄하였다. 생
싯닷타는 빈비사라왕의 정치적 제의를 거절하고 강가강 북 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라는 논리 자
쪽의 신흥 상업도시인 웨살리로 갔다. 웨살리는 개의8~9 부족 체가 모순임을 자인한 것이다. 싯닷타는 그 당시로는 유명한 수
으로 구성된 왓지연맹국의 수도이자 니간타들의 포교 중심지 행자요 철인들을 모두 찾아 배움을 청하였으나 만족할 수가 없
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의 곁을 떠난다. 싯닷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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