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붓다동산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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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통사 무량전 경』에 나오는 불광관 수행을 꾸준히 하신 공적이
크다. 그 스님이『화엄경』을 설법할 때마다 3천
좋았다고 한다. 그 동자가 바로 문수동자로서 명이 모여들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이렇게 오대산에는 문수동자가 상주한다고 전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3천 명이 모인다는 것은
해진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탈스님이『화엄경』
오대산 입구에는 존승사라는 절이 있다. 이곳 을 설하면 광명이 비쳤기에 절 이름을 불광사라
은 대불정존승다라니를 모신 곳이다. 인도의 붓 했다.
다파리라는 스님이 동북방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당나라 때 측천무후 시대에는 이통현 장자가
계시다는 말을 듣고 인도에서 7년에 걸쳐 참배하 80화엄경 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주를 달아『신화
기 위해 왔다. 이 스님이 존승사에 도착하자, 한 엄경론』을 썼다. 이를 저술한 곳이 바로 오대산
노인이“존승다라니를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이다. 이『신화엄경론』은 후대 우리나라 고려시대
이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것을 가져와 지눌스님에게 영향을 미쳐 현 조계종의 근간이
야 이곳의 죄 많은 중생들이 죄 업장에서 벗어나 되고 있다. 월정사에 계시다가 입적하신 탄허스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스님은 다시 님께서『신화엄경론』을 번역하셨다.
7년에 걸쳐 인도에 가서 다라니를 모시고 와 돌 오대산은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기둥에 존승다라니를 새겼다고 한다. 오대산에 가장 먼저 세워진 절은 대부 영취사이
다. 한나라 때 불교가 들어오면서 축법등, 가섭
2. 중국 오대산에 전해오는 이야기 마등 등이 오대산에 세운 절이라 한다. 이는 전
설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오대산이 학문적으로 성지가 된 것은 영변 스 그 후 당나라 때 대부 영취사가 대화엄사로 이
님이『화엄경론』을 써서 배포한 데서 비롯된다. 름이 바뀐다. 이 대화엄사에서 화엄종 4조인 청
또 해탈스님은 수나라에서 당나라에 걸쳐 활동 량국사 징관 스님은『화엄경』을 강의하고『화엄경
한 스님으로, 오대산 불광사에서 50년간 산문을
나가지 않고, 오로지『화엄경』을 독송하고『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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