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붓다동산7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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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왜인들이 지은 선시를 쓴 금·은의 병풍을      인사에서 요양하다가 년1610 8월 일26 설법하
길 좌우에다 늘어 세웠다.                 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
 유정은 그 병풍에 쓴 글들을 걸어가면서 한번      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훑어보고는 모두 기억하여 두었다.              몇 년 전 용인에 있는 '세중 옛돌박물관'에 석
 관사에 들어가니 병풍에 쓰인 글에 대해서 왜      인상(石人像)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일본에 반
인이 물었으므로 그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아까     출되어 있던 문인석, 무인석, 동자석, 벅수등 70
본 글을 다 외워 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여 쌍을 이 박물관에서 다시 찾아다 놓았던 것이
 왜인들은 다시 철마를 불에 달구어서 거기에       다. 그런데 박물관 한쪽 벽면에 두 사람의 한시
유정을 타게 하고 또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하     가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대사가 임진왜란
였으나, 갑작스레 비가 내려 불더미를 순식간에      이 끝난 후인 년1604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통
식혀버렸다.                         일을 성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혹은 무쇠 풀무의 화방 속에 앉혔는데 타죽기      를1542~1616) 처음 만났을 때 주고받은 문답이
는 고사하고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으       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죽은 히데
며, 그 불구덩이 속이 온통 얼음으로 되어 유정     요시 추종 세력인 서군(西軍)과 이에야스 세력인
은 도리어 큰소리로,「너희 섬나라에 나무가 많      동군(東軍)이 격돌하여 큰 전쟁을 치렀다. 1600
다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찬 방에서 사람을 욕보      년 9월 15일에 천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세키가
이는가?」하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간특한 왜인      하라 전투'가 이것이다. 여기에서 이에야스의 동
들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유정을 괴롭      군이 승리하면서 일본 열도는 완전한 통일이 이
혔지만 유정은 모든 것을 도술로써 잘 막아내어      루어졌고, 그 여세를 몰아 이에야스의 기세가 최
털끝만치도 다친 데가 없었다.               고조로 달해 있던 시기에 사명대사가 방문한 것
 이에 왕을 비롯한 왜인들은 크게 놀라 선인 또     이었다.먼저 이에야스가 사명대사에게 선제공격
는 생불이라고 우러러 받들었다. 그로부터 그들      을 날렸다.
은 금으로 만든 상품의 교자에 태워서 모시고 다
녔는데 화장실에 갈 때에도 그렇게 금교자에 모       石上難生草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시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왜왕에게 두 나      房中難起雲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거늘
라가 길이 친화할 것을 다짐받고, 포로로 잡혀갔      汝爾何山鳥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
던 우리 동포를 모두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來參鳳凰群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는가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떠나을 때 우리 동포 남
녀 여명을3000 데리고 왔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년1605 6월 국왕에게 귀국 복명하고 그 해 10  한문은 같이 썼기 때문에 붓으로 는 필담은 가능
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1604    한 상황이었다.
년 2월 입적)에 예를 올렸다. 그 뒤 병을 얻어 해   곧바로 사명이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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